본문 바로가기
인물

원균

by mikangg 2022. 8. 1.

직위

같은 선무공신 1등이라도 권율과 이순신의 경우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의 품계를 받은 반면 원균의 경우는 종1품 숭록대부의 품계를 받았다. 대광보국숭록대부와 숭록대부의 사이에 정1품 보국숭록대부가 있다. 당시 권율과 이순신에게 각각 영의정과 좌의정 및 부원군의 작호가 추증된 반면 원균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군의 작호가 추증되었다. 국왕 선조에 의해 어거지로 선무공신 1등이 되었는데도 종1품에 머무른 점을 보면 조정에서도 원균의 평가가 좋지 못했음을 단면적으로 드러낸다 할 수 있다.

 

정치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간단하다. 선조는 올려주고 싶은데 이에 호응하는 신하가 1명도 없고 죄다 반대했기 때문인데 그래도 임금이 하자는 거니까 마지 못해 올릴 수 있는 최소한의 추증만 올린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도 칠천량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피땀 흘려 부강하게 키워 놓은[9] 조선 최정예 수군의 군함을 12척 남기고 모조리 침몰시키는 대패를 당하고 공적을 위해 인간 백정 행각[10]까지 저지른 주제에 부총리에 해당하는 좌찬성과 검찰총장 및 기무사령관에 해당하는 판의금부사를 제수받았다니 분에 차고 넘치는 처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선조가 이토록 원균 추증에 매달린 이유는 본인이 직접 발탁하고, 본인이 시키는 대로 하다가 전사한 장수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원균의 칠천량의 대패의 소식을 듣자마자 '이 패전은 누구의 잘못도 아닌 하늘이 그렇게 만든것이다'라는 현실도피를 했고, 전후에는 원균을 집요하게 1등공신으로 추증하여 '잘못된 인선과, 잘못된 작전명령'의 최종책임자인 선조 본인의 과오를 희석시키려 한 것이다.

원균 초상화이다.
원균

임진왜란

임진왜란 초기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원균을 비판하는 이들이 가장 잘 못 알고 있는 부분이 이 부분으로 잘못된 비판으로 원균옹호론자들에게 빌미를 많이 준다. 선조실록이 기록유실이 심해 일괄적인 정리가 되지 않았고 승정원일기도 남아있지 않다는 점도 크다.

 

이순신에게 일본의 침공 사실을 바로 전달한 사실은 난중일기에서 검증된다. 이후 선조실록 510일자 기사에 실린 선전관 민종식의 전선 시찰 보고에 의하면 원균이 적선 30여 척을 격파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628, 경상 우도 초유사 김성일이 올린 경상도 전선의 상황 보고에는 원균이 군영을 모두 불태우고 보유 판옥선을 전부 자침시킨 후 전선 1척을 몰고 도망쳤다는 보고를 올린다.

 

원균 비판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실수가 이때 원균이 경상우수영 전력 70여척을 전부 자침시켰다며 열변을 토하는 것이다. 전근대 조선수군과 현대 한국해군을 구분하지 못해서 저지르는 실수다. 현대 해군이야 모항에 전투함들이 모여 있고 승조원들이 언제든지 출동지시에 응할수 있도록 대기태세를 갖추고 있지만 왜구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키워진 전근대 조선수군은 소규모로 쪼개어 관할 진포에 흩어져 있었다.

 

경상우수영이 수영중에 가장 규모가 크다곤 하나 그만큼 관할 구역도 넓어 임진왜란 직전에 816포였다. 70여척의 전선들은 816포에 흩어져 있었지 경상우수영에 모여 있지 않았다. 게다가 배를 움직일 인원들도 항시 배치되어 있지 않다. 조선수군은 상하번으로 나뉘어 근무했고 전시에는 지방관들에게 통보해 병력을 소집하는 절차를 거쳐야 했다.

 

고니시는 경상좌수사 박홍의 관할에 상륙했지만 구로다 나기사마사가 이끄는 제3군은 우수영 관할로 상륙해 밀고들어왔고 전쟁 이틀만에 동래성이 함락되어 경상도 전역이 전쟁공황과 행정마비 사태가 몰아닥쳤다.

 

경상우수영의 3분의 1 규모로 경상-전라 4개 수영중에 가장 규모가 작았고 전화를 입지 않았던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이 병력과 전선을 모두 소집하는데 보름이 걸렸다. 전라좌수영의 2, 경상우수영의 3분의 2 정도 규모인 이억기의 전라우수영은 해당 기간안에 병력과 전선을 모으는데 실패해서 이순신의 1차 출동에 함께하지 못했다.

 

전화도, 아스팔트 도로도, 자동차도 없던 시대다. 지금처럼 휴대전화로 예비군 소집문자 보내면 택시타고 가는 시대가 아니다. 전라좌수영이 소집에 보름이 걸렸고, 전라우수영이 그보다 오래 걸렸다면, 제일 큰 경상우수영은 당연히 20일 이상 소모된다고 생각해야 한다. 물론 일본군의 직접적인 공격이 없었다는 가정하에.

 

, 원균은 경상우수영 전력을 동원할 시간 자체가 없었고, 누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무리였다. 단순히 경상우수영이 와해되었다고 원균을 비판하거나, 그 자리에 이순신이 있었으면 달랐을거란 주장은 전근대 시대상과 소규모 국경방어 병력이 시간을 끄는 동안 병력을 모아서 내려보내는 조선의 방어전략에 무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잘못된 비판이 원균옹호론자들에게 파고들 틈을 준다. 경상우수영 전력은 원균이 70척을 불태운게 아니라 애초에 모일 틈도 없어서 각지에 흩어진채 와해되었다고 보는게 맞으며 원균이 군영을 불태운건 그런 상황에서 일반적인 대응이다.

 

이런 참작 사유가 있었기에 이각, 이유검 등 도망친 경상도 지휘관들을 본보기로 참할 때 살아남아서 계속 쓰임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잘못된 원균 비판론은 여기서 원균이 중앙에 빽이 두터워서 살았다! 라며 엉뚱하게 윤두수를 공격해서 원균옹호론자들이 파고들 틈을 더욱 열어준다.

 

원균의 진짜 문제점은 이순신과 합류하고 난 뒤의 모든 행동이다. 경상우수영을 건사 못한건 전근대 현실 감안하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인데 이순신에게 합류한 뒤 칠천량까지 보여준 모든 행동은 어떤 기준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악행과 무능으로 점철되어었다.

 

옥포 해전 이후 조정에 공적을 알리는 장계를 올리는 문제로 이순신과 갈등을 빚게 된다. 원균과 이순신의 반목이 날로 심해지자, 조정은 1595년에 원균을 충청 병사로 발령을 냈다. 3품 수사에서 종2품 병사로 발령이 났으니, 여하간에 승진이었다. 충청 병사 재임시에 상당산성을 다시 건축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완공된 후에 비가 내리는 바람에 도로 무너지고 말았다. 그 외에도 포악하고 탐욕스럽다는 이유로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받았으나, 선조의 옹호로 관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이후에 이몽학의 난이 일어난 1596년에 전라 병사로 다시 전출된다.

 

정유재란이 발발하고 요시라가 반간계로 조정과 이순신을 흔들고 있을 때 원균은 '수군이 출동해서 부산 앞바다에서 위용을 과시한다면 가등청정이 수전에 약한지라 그냥 물러날 것이다'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그리고 선조와 비변사는 원균의 이 상소에 대해서 그럴 듯하다고 받아들임으로써, 이순신이 파직되는데 한 몫을 거들게 된다. 하지만 경상도의 주요 항구 및 포구 및 거점들이 일본군들에게 모두 점령되어있는 데다가 일본군들이 곳곳에 왜성을 쌓아서 해로를 감제하고 있는 점을 완전히 배제한 원균의 상소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소리다. 물론 이순신이 전쟁 첫해 부산포로 한번 쳐들어가서 이긴 적은 있지만, 그 때는 왜군이 성을 쌓아 육상에서 해로를 감제하기 전이므로 같은 방식이 또 통할 수가 없다.

 

정유재란 당시에는 이순신이 부산포로의 출전을 거부했다는 게 통설인데, 이순신은 이미 가토가 상륙하였음을 알고도 부산포로 출전했었다. 실록 1597223일 기사에 따르면, 210(이미 조정에서는 26일에 체직이 확정된 상태였지만 그 소식을 전달할 선전관이 도달하기 전이었음) 김응서와 함께 부산포로 출전해서 늘 하던 것처럼 신나게 부수다가 돌아왔고, 원균이 했던 것처럼 가덕도에 하루 머물렀다. 이때 가덕도의 왜군이 기습해서 초동 1명이 전사하고 병사 5명이 잡혀갔는데, 이순신은 이에 대노하여 가덕왜성에 포화를 퍼부으며 공성전을 벌였고, 부산에 있던 요시라가 직접 내려와 협상 후 포로들을 돌려받은 후에야 돌아갔다. 굳이 이걸 언급하는 이유는, 이후 원균의 졸전과 너무나도 비교되기 때문이다. 이때 이순신의 병력은 겨우 62척이었고, 육군 장수 김응서와 합동했다.

 

실제로 원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부임한 후에 육군이 가덕도와 안골포를 점령해야 부산포로 출정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원균 본인마저 수륙병진으로 부산포 출정을 주장했으니, 위의 수군 단독으로의 부산포 출정 주장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보여준다. 원균은 통제사에 제수되기 전에는 이순신이 겁쟁이라서 부산을 공격하지 못한다면서 자주 비난하는 발언을 했는데, 정작 그 역시 제대로 공격에 나서지도 못하는 주제에 권율에게 호출당해 곤장을 맞는 치욕까지 겪었고, 결국 출전은 하였으나, 칠천량 해전이라는 한국 전쟁사에 길이길이 빛나는 기록적인 대패를 당하게 된다.

'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북선 제작자 나대용  (0) 2022.08.21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