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고대의 정치발전 단계론
- 서론 -
한국 고대사에서 국가의 기원 및 형성에 관한 문제는 197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 후반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나, 또는 전통 마르크시즘에서 국가의 본질적 속성과 역할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면서 정치·사회·경제 등의 여러 분야에서 국가에 대한 본격적 검토가 이루어진 바 있는데, 그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국가의 본질에 관한 검토는 한편으로 국가의 기원 및 형성에 관하여 역사적 시각으로 접근하는 연구를 활성화시켰고, 이와 아울러 국가 기원에 관한 인류학적 성과를 축적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특히 한국 고대사 분야에서 국가 기원 및 형성과 관련된 논의는 이러한 미국 인류학계의 성과가 소개 수용되고, 또한 국내에서 새롭게 축적된 고고학적 성과에 의해 종래 불신되었던≪三國史記≫초기 기록에 대한 신빙성이 제고되는 상황에서 나타나게 되었다.
- 본론 -
한국 고대국가의 기원과 형성문제에 관한 논의를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같은 논의가 전개된 배경과 기왕의 연구성과에 나타난 문제점 및 쟁점사안에 대한 검토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종래 한국사에 적용된 정치발전 단계론의 내용을 보면 일찍이 白南雲이 제시한 原始氏族社會에서 原始部族國家로, 그리고 奴隷國家로 발전·전개되었다는 주장에서 그 최초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는 夫餘·沃沮·三韓·초기 고구려 등을 부족국가 단계로 설정하였던 것이다. 백남운의 이같은 주장은 마르크스(K. Marx)의 유물론적 역사발전 단계에서 국가 성립 이전 단계를 막연히 원시사회라고 단순화시켜 표현한 것에 대한 하나의 보완으로서 엥겔스(F. Engels)가 제시한 국가 성립 이전 단계의 다양한 정치적 발전도식을 수용한 것이었다.그런데 이같은 견해는 모르간(L. Morgan)이 인간역사의 진화도식을 야만(전기-중기-후기)-미개(전기-중기-후기)-문명의 7단계로 구분한 인식체계를 근거로 한 것이었다. 모르간이 제시한 이러한 발달 단계는 인간이 조직한 최초의 사회인 가족을 구성하는 방식 즉 혼인형태의 변화 발전에 기준을 둔 것이었다.
백남운이 제시한 이같은 발달 단계는 이후 사회경제사학자로 분류되는 일련의 학자들에 의하여 노예제문제에 대한 논란이 있기는 했지만 기본적인 틀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즉 사회경제사학자들의 인식 범주는 기본적으로 엥겔스와 마르크스에 의해 제시된 역사발전론의 테두리 안에서의 그것이었으며, 특히 국가사회로의 발전·전개에 대한 견해는 백남운이 주장한 내용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이같은 인식은 이후 해방과 분단의 상황속에서도 큰 변화없이 남북한학계에 그대로 유지되었다. 남한의 경우 한국사 전반에 걸친 유물사관적 인식은 배제되었지만 국가 형성기까지의 역사의 발전 단계를 설정하는 데는 기왕의 백남운과 사회경제사학자들이 제시한 단계 및 용어가 그대로 사용되었다. 즉 신민족주의를 표방한 孫晋泰의 경우 고대사회의 발전을 씨족공동사회-부족사회-부족국가-部族聯盟王國-貴族國家로 상정하였는데, 이같은 이해는 모르간의 진화주의적 발전론에 입각한 엥겔스의 체계가 전제된 인식이었다. 손진태의 이러한 발전 단계론은 많은 영향을 끼쳐 이후 한국사의 여러 개설서에도 반영되어 계속 유지되었다.
그런데 국가의 기원과 형성에 관한 인식이 보다 체계화되고 구체화된 것은 1960년대에 들어와서의 일이었다. 하지만 발달 단계론의 면에서는 여전히 기왕의 틀을 답습하여 부족국가-부족연맹-고대국가로 성장 발전하였다고 봄으로써 당시 서구학계의 주된 흐름이 소개되거나 적용되는 단계에까지는 나아가지 못하였다. 특히 기왕에 사용되어온 ‘부족국가’와 ‘부족연맹’의 개념과 내용이 모호하게 처리됨으로써 다음 단계인 고대국가의 성격과 개시 시점에 관해서도 불분명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는 백남운이 제시한 발달 단계와 큰 차이를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같은 맥락의 이해체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1970년대에 들어서자 이같은 발달 단계론에 대하여 특히 ‘부족국가’라는 용어에 문제점이 있음이 제기되면서 이후 한국 고대의 국가 기원과 형성에 관한 논의를 촉발시켰다. 즉 혈연적 유대관계에 기반을 둔 씨족과 부족이라는 개념이 이것의 파괴를 전제로 한 국가라는 개념과는 합성될 수 없다는 원론적인 문제점이 제기되었다. 즉 복합적 계층사회인 國家를 규정하는 용어와 혈연적 단순사회를 표현하는 용어인 ‘部族’이 결합되어 사용된다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이다. 부족국가라는 개념은 우리 나라 역사의 발전과정에 나타난 특징을 가지고 도출해낸 것이 아니고 인류학의 개념을 차용하여 우리 역사에 적용시킨 것이었다. 역사의 발전 단계를 설정하고 그 시대의 특성을 개념화하는 용어를 선택할 때에 꼭 인류학 이론만이 옳은 것은 아니며, 또 우리 나라의 특성만을 열거하는 것이 옳다고 할 수는 없다. 역사의 전반적인 전개과정에서 일관된 성격을 나타낼 수 있는 좋은 개념의 용어가 있고, 또 그것이 우리 역사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라면 굳이 이를 마다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가능하다면 세계사의 보편적인 발전 과정과 서로 대비하거나 또는 연결시킨다는 점에서 비슷한 개념이 통용될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가 적극 수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같은 주장에 따라 막스 베버(Max Weber)의 국가 발전 논의를 수용하여 부족국가 대신에 ‘城邑國家’라는 용어를 사용하자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성읍국가는 서양의 都市國家(City-State), 중국의 邑制國家 등의 개념에 대응되는 것으로서 씨족제-성읍국가-領域國家-大帝國이라는 계기적 단계론을 전제로 한 것이다. 이같은 성읍국가론을 수용하여 성읍국가-聯盟王國-王族 중심의 귀족국가로 성장 발전하였다는 주장이 제시되었다. 이 견해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묘제인 고인돌을 권력의 소유자가 나타난 하나의 징표로 보고, 나지막한 구릉에 土城을 쌓고 살면서 성밖의 평야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농민들을 지배해나가는 정도의 사회를 성읍국가에 알맞은 존재라고 설명하였다. 그런데 유럽 등의 서양사에서 사용되는 용어인 도시국가와 중국사에 등장하는 읍제국가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이는 우리 나라의 성읍국가라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본다면 결국 도시국가를 뜻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성읍국가라고 할 경우에 우리 나라의 역사에서도 도시국가의 여러 특징이 그대로 표출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성읍국가론은 성읍이라는 용어만이 등장할 뿐 그 내용의 실체는 전혀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마치 우리 나라에도 서양 고대의 도시국가가 존재했던 것처럼 짐작하게 하는 맹점을 가지고 있다. 성읍국가를 ‘City-State’로 칭할 수 없어 ‘Walled-Town State’라고 한 단계 낮추어 표현한 것이라 하더라도, 이는 도시국가라는 개념을 전제로 한 것이므로 우리 나라에서 성읍국가라는 것은 전형적인 도시의 발달을 볼 수 없다는 점에서 적절하지 않다는 지적이 있었다. 특히 성읍국가의 단계는 고고학적인 면에서 고인돌과 靑銅器文化가 언급되고 있으나 성읍국가에 부응하는 구체적 유적이 발견되지 않고 있는 것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한편 서양의 인류학에서 발달한 정치발전 단계론을 원용하여 한국 고대사의 이해를 보다 심화시키는 일련의 연구가 제시되었다. 즉 국가가 형성되기 바로 전단계 사회의 성격과 의미를 강조한 서어비스(E. R. Service)의 정치발전 단계론을 수용하여 이를 한국 고대국가의 기원과 형성문제와 관련하여 君長社會論을 주장한 것이 그것이다. 즉 삼한사회의 성격을 문헌에 나타난 인구수와 고고학적 발굴성과를 토대로 하여 청동기문화와 石棺墓 및 土壙墓문화에 기반을 둔 군장사회(Chiefdom)로 파악하였다. 또한 프리드(M. Fried)의 정치발전 단계 유형을 원용하여 衛滿朝鮮은 2차국가(Secondary State)로서 征服國家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이보다 앞선 箕子朝鮮 즉 濊貊朝鮮 후기 단계는 초기국가(Pristine State)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 견해를 따른다면 한국에서 고대국가의 형성시기를 최소한 기원전 4∼3세기로 설정할 수 있으며, 이론의 도입과 적용이라는 면에서 국가발달 단계론에 관한 논의를 새로운 차원으로 고양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이같은 논의의 뒤를 이어 서어비스의 견해를 신라국가 형성과정에 적용한 연구성과가 나오게 되었다. 이에 의하면 신라사회의 발전을 村落(酋長)社會 단계의 斯盧六村, 촌락사회의 연맹인 斯盧小國 단계, 사로국을 맹주국으로 하는 辰韓 小國聯盟 단계, 사로국의 진한 諸小國 정복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고 한다. 특히 취프덤이라는 용어를 ‘추장’이라 번역한 이 연구는 추장이라는 용어가 우리 나라 역사에는 낯선 것이어서 거리감이 있을 뿐만 아니라, 기왕의 취프덤론에서 설정한 단계의 정치수준과는 서로 맞지 않는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특히 개념이 모호한 소국이라는 용어로서 몇 개의 정치발전 단계를 설명함으로써 城邑國家論에서 제시한 단계론을 차용한 인상을 줄 뿐만 아니라 논리의 일관성에도 문제가 있어 보인다. 한편 국가 발달 단계론과 관련하여 플래너리(Kent V. Flannery)가 제시한 국가 형성에 관한 이론을 위만조선에 적용하여 위만조선이 바로 무역과 교역을 중심으로 성장한 국가 단계임을 지적한 견해도 있다.
- 소결 -
이같은 정치발전 단계론은 모두 미국의 新進化主義 이론에 근거한 것으로서 국가 이론에 관한 논의가 심도있게 진행되면서 내용의 폭과 깊이가 더해졌는데 이러한 논의에 대한 비판도 최근 제기되고 있다. 신진화주의 인류학 이론을 한국사에 적용하려고 한 학자들의 일부 견해에 대하여 문제점을 지적하고, 군장사회를 하나의 정형화된 사회 단계로 보는 시각은 수정되어야 하며 군장사회는 국가로의 이행과정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유동적인 사회변화의 모습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하는 주장이 그것이다. 또한 이 비판에서는 無頭社會로부터 官僚國家로 이행하는 과정에 나타나는 중간 수준의 사회로서 군장사회를 이해한 얼(T. Earle)의 견해를 소개하면서 기왕의 논의에 보완이 필요함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기왕에 진행된 논의는 국가와 국가 이전의 단계를 어떤 각도에서 풀어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하여 內的 발전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고찰한 연구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기왕의 연구에서는 先史時代와 역사시대를 연결하는 시점에 대하여 검토하면서 고고학 자료와 문헌 자료를 연결하여 理論과 假說을 활용하였다는 점이 높이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역사 전개의 다양한 양상을 다채롭고 역동적으로 파악하기 위하여 우리 나라와 중국측의 문헌과 고고학적 자료를 충분히 검토한 바탕 위에서 이론과 가설을 활용 검증하였다는 점이 기왕에 이루어진 연구의 특색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앞서의 비판에서 신진화론이 논란의 대상이 된 것은 이를 비판하는 학자들이 일부의 편파적인 견해만을 취했거나 진화론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는 반론도 있다. 또한 서어비스의 사회 정치적인 진화론적 모델은 일부 비판을 받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동서양을 막론하고 선사시대 사회를 연구하는 데 유용한 개념으로 이용되고 있음이 재삼 지적되고 있다.
어쨌든 국가가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은 지역적으로나 문화 단계적으로 언제나 일치하지는 않겠지만, 우리 나라의 경우 군장사회 단계와 국가 단계는 문헌 자료에서 일차적 구분이 가능하며 고고학적으로도 각각의 단계가 구분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를 위한 개념틀로서 신진화주의 이론은 여전히 유용한 개념으로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군장사회에 관한 논의는 청동기시대부터 시작하여 삼한사회 등을 포괄하는 범위에서 진행될 수 있으며, 삼한사회 및 그에 준하는 비슷한 수준의 政治體의 성격은 국가 형성을 지향하는 정치체로서 국가에는 이르지 못하였으나 이들 여러 정치체가 각각 국가 형성을 지향하는 역동성을 내포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들 선행하는 군장사회의 발전에 의하여 고조선 후기·위만조선·고구려·부여·백제·신라·가야 등의 여러 정치체가 국가 단계로 성장하여 다양한 역사를 전개시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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