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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위만 조선

by mikangg 2022. 7. 7.

□ 철기문화의 성립

기원전 3세기경 요동 및 한반도 북부 지역부터 초기 철기시대가 시작되었다. 아래 표는 청동기와 철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들이다.

 

청동기 세형동검, 청동거울
철기 철제 도끼, 호미, 괭이, 보습, 낫

 

초기 철기 시대로 오면서 농업이 발달하였다. 따라서 농경지역이 확대되었으며 농업의 생산성이 향상되었다. 기원전 1세기경에 한반도 전 지역이 철기시대에 진입하였지만 철제 무기는 주조 위주의 초보적 수준이었다. 또한 철기의 사용으로 인하여 경제기반이 확대되었다.

 

□ 위만조선의 성립 및 변천

- 위만조선의 성립 - 

중군 전한의 역사학자 사마천이 쓴 사기 조선전에서 최초로 보인다.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진이 망하고 한이 들어서자 한의 고조는 노관을 연의 왕으로 봉했다. 그러나 정치적 불안으로 노관이 흉노로 도망가자, 한은 연을 정벌하였다. 이때 위만은 연에서 1,000여명을 이끌고 조선으로 망명하여 조선의 왕인 준의 신임을 받아 국경 수비의 일을 맡았다. 하지만 망명자들의 힘을 모아서 준왕을 몰아내고 조선의 왕이 되었다. 이를 두고 중국인 이주자들의 식민 정권을 운운하는 주장이 있었지만 최근에는 중국 동북지역에 동이족(조선족)이 있었다는 사실 및 위만조선의 그 후 행보를 보아 중국으로부터의 유이민과 토착민족과의 연합정권 또는 동이계 유이민들이 철기문화를 기반으로 위만조선을 성립시킨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기원전 108년당시 고조선의 세력도
[ BC 108년 고조선 세력도]

 

- 위만조선의 성격 -

위에서 한번 언급했듯이 최근에는 유이민과 토착민의 연합정권으로 보고 있다. 그 이유 중 첫번째는 위만은 연에살던 고조선계사람으로 보고 있다. 위만은 조선에 입국할 때 상투를 틀고 동이인의 옷을 입고 있었다. 두번째는 기존 토착민인 준완이 위만을 신임하여 박사에 임명하였으며, 서변 방어를 맡겼다. 세번째는 위만이 정권을 획득한 후 조선이라는 국호를 유지하여 예맥조선의 계승,발전을 하였으며 토착민 출신의 유력자들도 지배세력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위만조선으로 오면서 국가체제가 변화되었다. 주변 정치체들을 복속시키며 정복국가적 성격으로 변화하였다. 또한, 주변 국가들과 한 사이의 경제적 교섭을 중계하면서 부를 증대시켰다. 이러한 성격으로 인하여 한이 중국을 재통일한 후 동방에 대한 중국의 확장정책과 대립하여 한나라와의 전면전이 불가피하였다.

 

- 위만조선의 체계 - 

위만조선의 성립 이후 상층 지배집단으로 왕, 태자, 비왕, 상, 대신, 경, 대부, 장군, 박사, 도위 등의 명칭을 가진 관직, 관위체계가 나타났다. 이 직위사이들의 고하는 확실하지 않지만 상, 대신, 대부의 순서이다. 상과 구별되는 장군의 별도로 존재했다는 것은 당시 사회가 직능 분화가 진행된 정치체임을 나타내고 있다. 박사는 관직이라기보다는 특별한 호칭으로 학문적 소양이 높은 사람에 대한 경칭이며 도위는 동부도위라는 호칭으로 미루어 보아 지방장관으로 이해된다.

 

사회체계는 상층 지배체계로 왕을 정점으로 한 왕실세력과 상, 장군 등의 중앙 통치계층, 피지배층의 다수인 민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자유로운 신분이지만 민 신분 이하의 존재인 노비가 존재하였다. 이들은 사회의 최하층 신분으로 국가체 구성과 관련된 피정복민 및 범법자에 대한 처벌로서 피지배층을 구성하는 강력한 존재이다.

 

8조법으로서 사회 질서를 유지한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8조법 중 3개 조항만이 전래된다. 전래된 8조법을 보면 생명과 노동력을 중시하였으며 사유 재산제를 인정하고 신분제 사회였다는 사회 모습을 알 수 있다.

[ 8조법 중 전래되는 내용]

- 남을 죽인 사람은 사형에 처한다

- 남을 때려 다치게 한 사람은 곡식으로 보상한다

-남의 물건을 훔친 사람은 그 집안의 노예가 된다. 풀려나기 위해선 50만전을 내야한다

 

□ 위만조선과 한의 전쟁

한은 흉노에 대하여 적극 공세를 취하여 하서사군을 설치하였으며 위만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기 위하여 섭하를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하지만 회담이 결렬되고 한이 전송하던 조선 비왕을 살해하였으며 귀국한 섭하를 요동동부도위에 임명하여 위만조선을 자극하였다. 이에 위만은 한을 공격하고 섭하를 살해함으로서 양측 간 전면전이 개시되었다.

 

한은 흉노와 남월에 대하여 정벌이 일단락 된 후 군대를 동원하여 조선을 침공하였다. 누선장군 양복은 산둥반도에서 왕험성으로 공격, 좌장군 순체는 요동의 병사 5만을 거느리고 출군하였다. 한의 수군은 주력인 육군과의 합동작전을 위해 대기하였으나 육군의 진격이 늦어 단독으로 공격을 감행하다 조선 수군에 패배하였다. 또한, 육군도 패수방면에서 위만조선군에 격파되었다. 이에 양국 간 화의를 진행하였으나 위만의 강경대응으로 화의가 결렬되었다.

 

이 후 계속된 전쟁에 위만조선은 지배층이 분열되었다. 또한, 우거왕의 피살 및 주화세력이 망명함으로 인하여 세력이 약화되었다. 이로서 위만조선은 BC108년에 멸망하였다

 

- 소결 -

위만조선 원정의 전후 처리내용을 보면 원정과 관련된 장군들 중 3명이 참형당하였으며 신분이 강등되었다. 전투 과정 및 이후 전개 상황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완전한 패배가 아니었다. 일부 지휘부 사이의 갈등으로 인하여 우거왕으로 대표되는 주전파 세력이 몰락하였으며 주화파 세력이 새로이 중심 세력으로 부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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