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여 - 소 발굽으로 점을 치다
부여에서는 밭농사를 주로 하였고, 목축이 발달하였다. 말, 모피 등의 특산물이 유명하였으며, 말, 소, 돼지, 개(사출도라 하여 마가, 우가 저가, 구가의 호칭에서 목축 사회의 흔적을 알 수 있다. 윷놀이의 기원으로도 알려져 있다.)의 이름이 붙은 군장 호칭도 있었다. 12월에는‘영고’(나라 안 사람들이 모두 모여 날마다 먹고 마시며 춤을 추었고, 이때에는 형옥을 중지하고 죄수를 풀어 주었다.)를 열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부여에서는 왕이나 지배층의 장례에 사람들을 껴묻거리와 함께 묻는 순장의 풍습이 있었다.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았으며, 물건을 훔치면 물건값의 12배를 갚게 하였다. 또한 간음한 자와 투기가 심한 부인은 사형에 처하기도 하였다. 전쟁이 나면 소를 잡아 그 발굽이 갈라진 모양을 보고 길흉을 점쳤다. 사람들은 흰옷을 좋아하였으며,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 풍습(형사취수라 하여 형이 죽어도 그 가문의 남자 형제가 다른 남자 형제의 아내와 아이들을 책임진다는 공동체 의식)이 있었다.
□ 고구려 - 무예를 숭상하다
고구려는 산악 지대에 자리 잡았기 때문에 농사보다 목축이 발달하였다. 말을 길들여 탈것으로 이용하였으며, 집집마다 부경이라는 창고를 두었다. 사람들은 사냥이나 씨름 대회를 열어 신체를 단련하고, 활쏘기와 말타기
등의 무예를 숭상하였다. 부여와 마찬가지로 법률이 매우 엄격하여 중대한 범죄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노비로삼았다.
고구려는 10월에‘동맹’(10월이 되면 하늘에 제사를 올렸는데, 이때 사람들은 수놓은 비단옷에 금은으로 장식을 하였다.)을 열어 하늘에제사 지냈으며, 서옥제(혼인을 정한 신랑이 신부의 집 뒤에 마련된 집에서 살다가 자식을 낳아 장성하면 아내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풍습)라는 결혼 풍습이 있었다.
□ 옥저 - 풍부한 해산물을 생산하다
동해안 지역에 자리 잡은 옥저는 농사가 잘 되고 해산물이 풍부하였으나, 정치 발전이 늦어 고구려에 소금, 어물 등의 공물을 바쳤다. 옥저에는 민며느리제(어린 여자아이를 며느리로 맞아들인 후 성인이 되면 여자 집에 돈을 주고 나서 정식으로 아내로 삼는 풍습이다.)라는 결혼 풍속이 있었다. 또 가족이 죽으면 시체를 가매장하였다가 뼈만추려 가족 공동 무덤(온 집안사람들의 뼈가 이 덧널 하나에 모두 들어갔다. 여기에 나무로 산 사람의 모양을 새겨 꽂아서 이 나무의 수효로 죽은 사람의 수를 알게 하였다.)인 커다란 나무 덧널에 넣어 두었다.
□ 동예 - 산천을 소중히 여기다
동예 사람들은 별을 보고 그 해의 풍흉을 점쳤고, 호랑이를 신으로 여겨 제사를 드렸다. 같은 씨족끼리는 혼인을 하지 않았으며, 산천을 소중하게 여겨 함부로 출입하지 않았다. 동예 사람들은 마을끼리 서로 침범하면 소나 말로 배상하도록 하였는데, 이를‘책화’라고 한다. 동예의 특산물로는 활, 과하마, 바다표범 가죽 등이 있었다. 10월에는‘무천’을 열어 하늘에 제사 지냈다.
□ 삼한 - 천군이 제사를 주관하다
삼한에서는 벼농사가 발달하였고, 벽골제, 의림지, 수산제 등의 저수지가 만들어졌다. 또 누에를 쳐서 비단을 생산하기도 하였다. 씨를 뿌리고 난 후인 음력 5월과 추수를 마친 10월에 사람들이 한데 모여 하늘에 제사 지내고 함께 어울리며 놀았다. 진한과 변한에서는 철이 많이 생산되었는데, 특히 변한에서는 덩이쇠를 화폐로 사용하였으며, 마한, 한의 군현, 왜 등에도 수출하였다.
삼한의 각 고을에는 제사장인 천군이 머무르는 소도가 있었는데, 이곳에 솟대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신성한 지역임을 표시하였다. 소도에는 군장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도망자들이 그 안에 들어와도 잡아가지 못하였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