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군과 고조선
청동기 문화의 발전과 함께 군장이 지배하는 사회가 출현하며 세력이 강한 군장들은 주변의 사회를 병합하고 점차 권력을 강화시켰다. 그 중 가장 먼저 국가로 발전한 것은 단군 왕검에 의하여 건국된 고조선(B.C.2,333)이었다.
고조선은 요령 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하였으며 인접한 군장 사회들을 병합하면서 한반도로 발전하였다고 보고 있다. 이렇게 보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고조선의 세력범위와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인 비파형 동검이 출토되는 장소가 거의 일치되는 것이 가장 크다.
□ 단군신화
환웅이 우사와 운사, 풍백을 데리고 세상을 둘러보다 곰과 호랑이를 만났는데 이들이 사람이 되고자 하여 환웅이 100일간 쑥과 마늘만 먹고 버티면 사람이 될 수 있다 하여 곰과 호랑이가 동굴에 들어가 쑥과 마늘만 먹으며 지냈지만 호랑이는 금방 동굴을 박차고 나갔으며 곰 혼자 100일을 버텨 사람이 되었다. 환웅이 웅녀라는 이름을 지어주며 자신의 처로 맞이하여 단군을 잉태하였다.
□ 고조선의 국호
본래 국호는 '고(古)'자가 없는 조선이었다. 따라서 1392년 이성계가 조선 왕조를 세우기 이전 시대의 기록에서 조선이라는 단어가 나온다면 고조선, 한민족 또는 만주 및 한반도를 지칭하는 것이다. 현재의 고조선이라는 명칭은 이성계가 1392년에 세운 조선과 구분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 고조선에 관한 기록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산해경 -
산해경의 해내북경에서는 조선의 위치를 '조선은 열양 동에 있고 바다 북쪽 산의 남쪽에 있다. 열양은 연에 속한다' 라 기록하였다. 하지만 산해경은 춘추시대에서 전한대에 걸쳐 여러지역에서 쓰여진 것들을 모은 중국의 지리서로서 산해경에서 말하는 조선이 언제의 상황인지는 알 수 없다.
- 관자 -
관자의 경우, 경중갑편과 규도편에서 춘추시대의 제와 조선간의 교역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관자는 제의 재상인 관중의 저술이지만, 전국시대의 제나라인들의 저술들을 관중의 이름으로 낸 것이다. 그러므로 관중에서 언급한 제와 조선과의 교역은 어느 시기의 것인지 알 수없다.
- 사기 -
사기의 소진전에 의하면, 소진이 연의 문후에게 당시 연의 주변 상황을 말하길 "연의 동방에는 조선 요동이 있고, 북쪽에는 임호,누번이 있다"라고 한것을 보면 당 시 조선이 연의 변경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으며, 연의 국세와 대외관계를 논할 때에 주의할 만한 세력집단이었음을 할 수 있다. 즉 늦어도 서기전 4세기 중반에는 조선의 존재가 북중국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고조선에 관한 학설
- 남한학계 -
고조선의 중심 위치에 대해서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논고에서 재요령성설, 이동설, 재평양설이 제기되고 있었으며 남한학계에서는 이 세가지 설이 모두 제기되고 있었다.
- 북한학계 -
북한학계에서는 고조선 중심지가 남만주 지역에 있었다는 재요령성설이 정설이었지만, 1993년 가을 평양에서 단군릉이 발굴되었다면서 고조선의 중심지는 평양이었다고 주장하며 그 기년이 BC3011년이라고 발표하였다. 하지만 평양의 단군릉은 모줄임고임 천장의 석실무덤이며 그 곳에서 출토된 금동관도 삼국시대의 것임을 볼 때,이 무덤의 주인은 고구려 사람으로 보는 것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 소결 -
이렇게 논란이 계속되는 이유는 고조선의 관련한 문헌이 매우 부족하며 있는 자료들도 단편적인 기록으로서 매우 추상적이고 모호하기 때문이다.
● 다음글에서는 위만의 고조선과 고조선의 정치 문화에 관하여 말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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